[최영훈의 법과 사람]정치 대통령 접고, 과학 대통령 되시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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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장영실은 조선 전기 당대 최고의 과학자다. 15세기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를 총애하고 발탁한 왕은 세종이 아니라, 아버지 태종이다. 세종실록에는 이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 한 줄 나온다. “장영실은 공교(工巧)한 솜씨가 뛰어나 태종께서 보호하시고 나 역시 그를 아낀다.”

태종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는 바람에 아버지(이성계)로부터 버림받는다. 이런 태종의 트라우마가 ‘과학 다문화 인재’를 발굴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태종은 재위 중 가뭄이 들면 부덕으로 하늘이 노한 탓이라며 대성통곡하는 일이 잦았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살육과 패륜을 저지른 업보 때문에 하늘의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했던 것이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동래 관기(官妓) 사이에서 태어났다. 1421년, 관노(官奴)였던 장영실은 명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명나라 천문 기구를 연구하라는 어명을 받은 것이다. 천민 출신으로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태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지만 국가 현안에 관여했다. 장영실을 외국 유학까지 보낸 태종의 유연한 인재 등용으로 그는 세종 때 꽃을 피운다. 상호군(上護軍·정3품)까지 승진하며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실사구시를 중시한 조선의 과학 수준도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24부작 대하드라마 ‘장영실’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태종·세종과의 인연을 감동적으로 그린다.

그제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의 연구개발(R&D)시스템을 혁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청와대에서 열린 ‘지능정보사회 민간합동 간담회’에서 “R&D 투자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전략회의를 신설하겠다”고 했다.

최근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박 대통령은 ‘알파고 쇼크’를 계기로 더 늦기 전에 인공지능 개발에 큰 경각심과 자극을 받은 것이 우리에게 행운이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R&D 투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2014년 기준 4.3%로 세계 1위, 절대 규모도 세계 6위. 하지만 연구개발 생산성은 미국의 3분의 1에 그친다. 박 대통령은 “지금은 누가, 얼마나 빨리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경쟁력이 좌우되는 시대”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군정(軍政) 시절이던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보고했다. 박 의장이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긴 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런데 기술 분야에는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 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 한마디가 대한민국 과학입국의 출발점이다. 경제기획원은 4개월 뒤 새로 과학기술 개발 청사진을 만들어 보고해야만 했다.

박정희는 지금도 나이든 과학기술자들에게 ‘영원한 과학대통령님’이다. 박 대통령도 과학대통령이 될 각오를 새로 다지기 바란다. 총선 대선 같은 선거정치에선 손을 떼고 4차 산업혁명을 성공시켜 ‘과연 박정희의 딸’이라는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장영실#태종#국가의 연구개발#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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