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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택한 노인들…남은 소망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남긴 말은?

조건희기자 , 김소영기자

입력 2019-11-15 16:16:00 수정 2019-11-15 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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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동노인복지센터에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어르신들이 구술자서전을 들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노인 40명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223쪽 자서전이 18일 출간된다.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책이다. 참여자들이 유명 인사여서가 아니다. 장차관이나 대기업 사장, 대학 교수를 지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어르신이 많아 구술작가가 듣고 옮기는 식으로 1년에 걸쳐 집필했다. 그런데도 이 자서전이 특별한 이유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로 연명의료를 거부한 이들이 인생을 돌아본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전의향서 공식 상담기관인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이 만난 노인 40명이 ‘존엄한 죽음’을 미리 선택한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이들의 자서전엔 한결같이 “미안하다”, “고맙다”는 표현이 담겼다.》

● 죽음 문턱에서 ‘미리 준비하자’ 다짐

김상연 씨(79·여)는 6년 전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더니 쓰러졌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심장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을 받았지만 얼마 후 재발했다. 그제야 ‘나는 이제 자다가도 죽을 수 있구나’라고 깨달았다. 갑자기 쓰러진 뒤 의식을 찾지 못하고 2년 넘게 연명의료를 받다가 숨진 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는 것보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수명만 연장하는 게 더 두려워졌다. 6일 서울 도봉구 창동노인복지센터에서 만난 김 씨는 “몇 년 동안 콧줄로 깡통(유동식)만 먹고, 가족들이 오줌똥 다 받아줘야 하고…. 그러느니 미리 준비하자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사전의향서를 썼다. 자서전 제안을 받았을 땐 ‘대단치 않은 인생인데 무슨 자서전까지 쓰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술작가에게 살아온 얘기를 하다보니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숨진 첫 딸에 대한 미안함 등 평생 응어리졌던 마음이 눈 녹듯 풀렸다. 김 씨는 “이제야 삶과 작별할 준비가 됐다.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살자고 다짐하니 남은 날이 더 소중해졌다”고 말했다.

조현아 씨(66·여)는 사전의향서를 쓰기 전엔 김 씨와 정반대로 하루 종일 죽음만을 생각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로 집을 잃고 남편과 이혼한 뒤부터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어떻게 해야 ‘실수로’ 살아남지 않을지 궁리했다. 하지만 자서전 구술작가를 만나는 과정이 치유의 시간이 됐다.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옷장에 있는 옷 중 가장 예쁜 것을 꺼내 입고 나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구질구질한 인생 얘기’를 다 털어놓으니 오히려 후련해졌다. 그는 “자서전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엔 ‘힘들 때 손 내밀어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 평생 처음으로 표현하는 고마움과 미안함

조규열 씨(81·여)는 몇 해 전 노인복지센터에서 ‘죽음 교육’을 받았다. 사전의향서를 작성하고 사후 안구기증 서약도 했다. 세상을 떠날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서전을 쓰면서 평생 다섯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큰 딸이 졸업장을 못 받은 일, 젖먹이였던 둘째 딸이 울며 보챌 때 안아주지 못한 일…. 조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런데 미안하단 말이 (입을 가리키며) 여기까지 나오다가 도로 들어가”라며 눈물을 훔쳤다.

그래서 조 씨의 자서전은 “미안하다, 얘들아”라는 말로 시작한다. 5쪽 분량 자서전에는 마흔 한 살이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형편이 어려워져 주워온 콩나물로 주린 배를 채운 일, 삶을 포기하려 방에 연탄불을 피웠던 일, 어렵게 기른 자녀들이 결혼할 때 뿌듯함에 눈물 흘린 일이 담담하게 적혀있다. 한번도 말로는 전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그는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평생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자서전에 비로소 털어놓은 건 조 씨만이 아니다. 손석주 씨(78)는 아내가 갑상선암 수술을 하는 날에도 회사 일이 바쁘다며 병원에 가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지금껏 한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12년 전 네팔 히말라야에 등반했다가 고산병 후유증으로 실어증에 걸려 말 그대로 ‘말을 잃은’ 권창준 씨(74)는 “아내에게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꼭 남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이들에겐 이번 자서전이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할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높다. 치매 증상이 시작된 이춘자 씨(99·여)가 그렇다. 이 씨는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가 자신이 이미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간 버팀목이 되어준 자녀들에게 더 늦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며 자서전에 참여했다.

● 사고로 두 다리 못 써도 “고마운 내 인생”


어르신들의 말을 옮겨 적는 재능 기부에 나선 구술작가들은 모두 사전의향서 상담교육을 받은 전문 상담가다. 어르신이 사는 곳마다 최소한 세 차례씩 찾아가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내가 무슨 자서전이냐’며 손사래 치다가 면담이 뜻밖에 길어진 경우도 많았다. 구술작가 유명숙 씨(73·여)는 “어르신들의 배움은 짧아도 삶의 지혜나 의지는 우리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구술작가들이 접촉한 가족들은 원고를 받아 읽어보고 난생 처음 알게 된 가족의 면모에 놀랐다고 한다. 오연순 씨(78·여)의 딸은 오 씨가 남편과 사별한 뒤 양로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는 글을 읽고 “우리 어머니에게 이런 꿈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구술작가 박재연 씨(55·여)는 “가족이 보기엔 ‘엄마’나 ‘아빠’였던 그 분들도 한 명분의 인생을 고스란히 살아오셨다는 데서 가족들이 놀라곤 했다”고 전했다.

자서전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6·25전쟁 등 근현대사의 굴곡뿐 아니라 개인적인 아픔을 겪고도 “그래도 살만한 삶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 중에서도 신애자 씨(76·여)의 아픔은 깊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나흘 만에 수류탄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까지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자 숨도 못 쉴 정도로 답답했다. 하지만 복지관에서 한글을 배운 뒤 글짓기 대회에 나갈 정도로 실력을 키우며 행복을 되찾고 있다. 이하재 씨(66)는 어릴 적 큰 병을 앓고 7년 전엔 대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겪었지만 시를 쓰며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씨는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 “마지막 소원은 ‘평온한 죽음’”

자서전 참여자들의 버킷리스트는 다양했다. 신동근 씨(69)는 이혼한 아내를 다시 한번 마주해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적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따뜻한 저녁상을 한 번 차려주고 싶다는, 이승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적은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자주 언급된 소망은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오랜 병치레 끝에 고통 속에서 삶을 마치는 지인들을 수없이 보며 ‘존엄한 마무리’가 절실한 화두가 된 것이다. 김현한 씨(73·여)는 죽기 전에 5일만 준비하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자서전에 참여한 노인 40명은 18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모여 출판기념회를 열고 축하 파티를 한다. 홍양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대표는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 주변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4일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 지난달 31일까지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43만457명이다. 사전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가까운 상담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lst.go.kr)나 전화(1855-0075)로 확인할 수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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