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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이 본 세상]불황 속에 나고 자란 그들… ‘초식남’ 넘어 ‘절식남’으로

박형준 특파원

입력 2015-06-13 03:00:00 수정 2015-06-1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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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일본의 우울한 新인류



일본 사회에서는 요즘 기성세대와 완전히 다른 ‘신(新)인류’로 불리는 젊은 세대가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태어난 이후 성장기를 거치면서 경기 활황의 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불황만 겪어온 세대다.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폭발 전후에 태어난 이들은 주식과 부동산 가격 폭락, 매년 줄어드는 임금, 떨어지는 물가 등 무너져 내리는 현상만 경험한 유일한 세대다. 쉽게 이름을 붙이자면 ‘불황 세대’다.

그들이 이제 25세 내외가 됐다. 유아기 때의 망각을 감안해 1985년에 태어나 30세가 된 세대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고도성장을 경험한 부모 세대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부모보다 가난할 것’이라는 예상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불황 세대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내 삶의 범위는 ‘1마일’

일본 전역의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관광 가이드북 ‘루루부(るるぶ)’가 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 사이에 갑자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2003년 11월 처음 발행된 이 책자 지역판은 ‘일상생활에서 지나쳤던 지역의 재발견’이란 모토를 내걸었다.

시와 구 단위의 지역판이 발행되자 책 구입 문의가 쇄도했다. 주요 수요층은 젊은이들이었다. 가이드북을 구한 젊은이들은 주말이 되면 이 책을 들여다보며 동네 맛집과 숨은 명소 곳곳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여행이라고 하면 적어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내 집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난 여행’으로 본 것이다. 가이드북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이 책의 지역판을 낸 시와 구는 ‘네리마(練馬) 구’를 비롯해 30곳이 훌쩍 넘었다.

2008년 ‘구메 히로시(久米宏)의 경제 스페셜 신(新)일본인 출현!’이란 민영방송 프로그램은 이 같은 젊은이들을 ‘1마일족’이라 불렀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반경 1마일(약 1.6km) 이내에서 생활한다는 의미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1마일족 젊은이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보도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바(千葉)의 한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인 주세연 씨(27)는 같은 반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다 대부분 고향이 지바라는 점에 적잖이 놀랐다. 주 씨는 “같은 대학의 한 일본인 친구는 졸업 후 도쿄(東京)에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고향이 정말 좋다’며 직장을 포기하고 지바에 남았다”며 “일본 젊은이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에 있는 대학을 선호하고, 직장도 그 지역에서 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일본 학생들의 고향 선호 현상은 통계로도 나온다. 일본 전역에서 실시된 학교기본조사에 따르면 고교를 졸업한 뒤 같은 지역(도도부현)의 대학에 진학한 학생의 비율은 1990년 35.5%였지만 2000년에 38.8%, 2010년에는 42.0%까지 올라갔다.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한 학생 중 거주지 현에 취직한 학생 비율도 1970년 68.7%였는데 2010년엔 80.4%로 높아졌다.

사도 아키히로(佐道明廣) 주쿄(中京)대 종합정책학부 교수는 1마일족의 특징에 대해 “안전하고 익숙한 길로 가려고 한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낙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다른 어느 세대보다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절식남’

도쿄에서 기업용 카탈로그 사진 촬영을 하는 여성 프리랜서 사진가인 기무라 지유키(가명·30) 씨는 3년 전부터 ‘곤카쓰(婚活·결혼활동의 줄임말)’를 하고 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기에 20대에 결혼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요즘 ‘결혼을 아예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는 “일본 남자들은 초식남(草食男)을 넘어 절식남(絶食男)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그 남자는 항상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일어선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이성(異性)에 관심이 없고 여성에게 말을 붙이지도 않는 남성을 ‘초식남’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가 생긴 것 자체가 초식남이 얼마나 흔한 현상인지를 보여줬다. 그런데 최근에는 초식남보다 더 여성에게 무관심한 이들을 가리켜 ‘절식남’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일본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라쿠텐(樂天)이 운영하는 중매 사이트 ‘라쿠텐 오넷’이 만 20세 성인이 된 남녀를 대상으로 ‘이성교제 상대가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2000년 조사에선 90%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그 비율은 점차 줄어 올해 조사에서 62.6%만 ‘필요하다’고 했다. 올해 조사의 경우 지금까지 교제한 사람 수에 대해 남성 50%, 여성 45.7%가 ‘한 명도 없다’고 답했다.

일본 남성들이 이성교제나 결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우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일본 내각부가 2010년 20, 30대 남녀 1만 명을 조사했더니 연봉 300만∼400만 엔(약 2700만∼3600만 원)인 남성의 결혼 비율이 27%였다. 그보다 연봉이 높으면 비율도 올라갔다. 하지만 연봉 300만 엔 이하 남성의 결혼 비율은 9%로 갑자기 뚝 떨어졌다. ‘연봉 300만 엔 벽’을 넘지 못한 남성은 사실상 결혼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괜찮은 연봉을 받는 이들도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지고 있다. 나고야(名古屋)에서 자동차부품회사에 다니는 사사에 유키(가명·28) 씨의 연봉은 약 450만 엔.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애정이 식을 테고 아이까지 생기면 경제적 부담은 더 커진다. 애인 없이 혼자 즐기는 게 훨씬 편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불황 세대의 친교 대상은 이성에서 부모로 옮겨가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의류 대기업에 다니는 나카다이라 히로코(中平寬子·26·여) 씨는 한 달에 한두 번 엄마와 함께 도쿄의 고급 이자카야(居酒屋·선술집)에 들른다. 엄마가 젊어 보여 자매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나카다이라 씨는 엄마와 데이트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무엇보다 술값 걱정을 안 해도 되지 않느냐”며 웃었다. 마음속 고민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단다. 나카다이라 씨가 입고 있는 의류와 액세서리는 모두 엄마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덴쓰(電通)종합연구소의 오기 마코트(小木眞·35) 주임연구원은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버블 경기(1980년대 중후반)를 경험했던 50세 전후의 여성은 전업주부가 많고 남편은 밤늦게까지 일했다. 자연히 애정을 쏟는 대상은 자녀였다. 특히 모녀는 친구 같은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돈은 아끼지만 쓸 때는 과감하게

올 4월 19일 도쿄 미나토(港) 구 게이오(慶應) 대 주위를 30여 명의 학생이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이 대학의 산보 서클 ‘RAMBLER’의 신입생 환영 모임이었다. 이들은 휴일을 맞아 학교 주위와 도쿄타워, 시바(芝) 공원 등을 약 2시간 동안 걸었다. 걷는 동안 거의 돈을 안 썼다.

설립 멤버인 게이오대 문학부 4학년 사소 겐타(笹生健太) 씨는 “산보를 하기 때문에 (교통비나 식비 등) 실비 외에는 돈이 들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할 수 있다. 갈수록 신입 회원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3명으로 결성된 RAMBLER는 현재 회원이 50명을 넘어섰다. 다른 일본 대학에서도 산보 서클이 늘어나고 있다.

불황 세대는 본능적으로 돈 쓰기를 주저한다. 저성장을 보고 자랐을 뿐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의 200%가 넘는 국가부채에다 저출산 고령화로 경제 활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신세이(新生) 은행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20대 회사원 47.7%가 ‘승급했다’고 밝혀 다른 세대보다 임금 상승 비율이 가장 컸다. 하지만 용돈은 1.6% 줄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모든 세대에서 유일했다. 이들이 아낀 돈은 우선 ‘저축’용이다. 광고회사인 ADK가 지난해 20대 젊은이들에게 돈 사용처를 설문한 결과 77.7%가 저축이라고 꼽았다. 이어 국내여행(48.5%), 취미(47.1%), 차 구매(19.4%)였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 동안 34세 이하 일본인들의 저축률(가처분소득 대비 저축액 비중)은 평균 23%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발족한 2012년 12월 시점과 비교해 5%포인트 올랐다. 한국의 평균저축률이 4%대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이들은 보통 짠돌이처럼 살지만 스스로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도쿄에 있는 대학의 건축학과에 다니는 후지와라 사쿠라(藤原櫻·22·여) 씨는 시급 1000엔인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하루 3시간씩 한다. 이를 통해 모은 돈으로 올여름 유럽 일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건축학을 배우는 만큼 유럽 건축들을 한 달 이상 두루 보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4년 전 보험회사에 취업한 사카모토 신이치(가명·24) 씨는 올봄 카르티에 명품 시계를 80만 엔을 주고 샀다. 한 달에 3만 엔씩 저축해 약 2년간 모은 것을 과감하게 쏟아부었다. 사카모토 씨는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본다. 투자이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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